(욥기강해 설교) 사람의 희망(욥기 14:1-22, 베드로전서 4:1-19)

우리는 모이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말 대로, 곧이곧대로 듣는 것을 바보처럼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Meres 라는 질병에 대해 수십 가지의 이론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언어조차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말하는데 그 말이 너무나 천박한 단어가 되었고 너무나 보잘것없고 힘이 없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또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라는 단어도 더 이상 우리에게 감흥이나 감동을 주는 단어가 아니고 경계하고 의심하고 의혹을 가져야 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곳곳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진리에 대한 갈급함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저 사람이 뭔가 요구하려는 것은 아닌가?’ 라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3천 억, 5천 억 들여서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또 그 큰 교회를 세상의 잣대로 보고 성공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 시대에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성공의 길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각각 생각이 다르고 기준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Sunday Christian을 우리는 한동안 비판했습니다. 교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오고 6일 동안은 아무 상관없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Seven Days Christian 교회에 매일 와서 살아야지만 진정한 교인으로 인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Sunday Christian 이든 Seven Days Christian 이든 무엇인가에 중독이 되지 않으면 어딘가에 집중하고 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욥기 13:20)‘

욥이 기도합니다. 원어를 보면 ‘나에게 두 가지 일을 행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의 기도의 제목이 14장에 나옵니다.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욥기 14:6)’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너무 힘듭니다. 이 시대가 그리고 나에게 관련된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나를 홀로 있게 하시고 잠깐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욥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1절부터 나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연약하고 부족하고 깨지고 부서진 존재인 사람, 인생은 짧은데 걱정은 가득하고 풀과 같이 시들 수밖에 없고 그림자 같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인생 가운데서 주님의 고난의 길속에서 나를 잠깐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홀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끝날 인생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이치인데 그 당연한 이치 속에서 나를 잠깐 쉬게 하시고 순간이라도 나를 진정한 안식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14장 13절에 기도의 제목이 나옵니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4:13)’

스올은 사람이 죽어서 갈 수밖에 없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 바깥 어두운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 빨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나를 그 죽음의 자리 가운데에서 쉬게 하여주시옵소서. 그 죽음의 자리 가운데 있어야지만 내가 이 고난 가운데 슬픔 가운데 이 절망 가운데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어차피 죽을 것인데 그 죽음의 자리에 나를 빨리 끌고 가서 잠시라도 쉬게 하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자연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또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소망을 가지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연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람에게는 인간에게는 더 이상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나를 빨리 그 죽음의 자리 스올의 자리에 끌고 가시라고 고통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가지고 있는 욥의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행복도 저주도 결국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님이 주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How to book 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서점에 가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성공의 비결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믿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주 가운데 있게 되니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행복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욥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거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잠시 내게 쉼을 주시고 내가 죽음의 자리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 고난이 무엇인지를 고백합니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14:22)’

죽음의 자리 가운데에서 긴장 가운데 있는 욥이 행복도 저주도 하나님의 것인데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결국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실존의 삶입니다. 내 삶이 결국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해결해야 되는 것이고 자신은 그것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이 아프고 여전히 영혼이 주님 앞에 애곡하고 슬퍼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 욥은 여전히 아프고 애곡할 수밖에 없을까?

욥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늘 예수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욥기를 읽고 또 욥에 대해 말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예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욥기강해를 시작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욥이 겪었던 사건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나에게 그런 사건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두려웠습니다. 그 말씀의 실재가 우리에게 경험된다면 정말 살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욥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면서 욥의 인생에 담겨있는 복음의 가치, 우리에게 복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정말 놀라운 사실,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프고 내 영혼이 애곡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래서 강하고 담대함으로 살아낼 수 있는 놀라운 예수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 가운데 예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늘 예수를 종교의 교주로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없다면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 아프고 애곡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 예수의 능력이 그 생명의 능력이 부요하고 존귀한 영광의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욥은 그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자신의 심정은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또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매 순간 순간 제사를 드리고 또 제사를 드리고 드렸던 그래서 남들이 볼 때는 부요하고 남들이 볼 때는 존귀하고 남들이 볼 때는 영광의 삶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결국 고난이라는 사건 속에서 보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한 것만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갑자기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Sunday Christian이든 Seven Days Christian 이든 무엇인가에 잡혀 있어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어떻게 서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고 그 안에서 예수가 일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그래서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희망은 비교하고 경쟁하고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희망이 우리 안에서 끝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 년 돈 모아서 집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 년 뒤에 내가 좀 더 건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교와 경쟁과 소유가 결코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어져야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악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진개진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덜 가졌다고 슬퍼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으스대고 아니면 어떤 일에 실패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쟁의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나은 무엇이 있으면 뭔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또 그것이 없어지면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한없이 미끄러져서 하나님이 나에게는 왜 그런 것을 주시지 않았을까? 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퍼합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겸손하라고 겸손한 자리에 있으면 자존감을 갖고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면 더 교만하고 없다고 생각하면 더 죄책감에 빠지고 절망 가운데 빠져서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 아닙니다.

페이스북에 사람이 찌질하다는 내용을 썼더니 어떤 분이 찌질하다는 표현이 좀 슬프다고 조금 괜찮은 표현이 없느냐고 예를 들어 존귀하지 않다고 하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표현을 썼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찌질하시다고 말했습니다. 찌질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공자를 연구하고 장자를 연구하신 분과 얘기를 했는데 그 분 말씀이 공자가 B.C 500년 사람이니까 예수님 보다 먼저라고 예수님 말씀이 다 공자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브라함은 B.C 2500년 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뭔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비교하고 경쟁하고 자기 소유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아름답고 더 존귀하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받으려고 합니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존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답지 않고 존귀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내 살이 아프고 내 영혼이 애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존귀함과 거룩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말씀이 저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예수님이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표준새번역 벧전 4:1)’

주님이 고난 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고난은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명이 있어서 보내심을 받고 고난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반드시’입니다. 그 때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마음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마음을 무장하지 않으면 영적 전쟁이든 가치의 전쟁이든 세계관의 전쟁이든 말에 대한 싸움이든 생각에 대한 싸움이든 그것에 대해서 무장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와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죄가 그쳤습니다. 육신으로 고난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고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4:12)’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 믿음의 행위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희망입니다. 예수는 오늘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그 열매가 오늘 우리 가운데 똑같이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끝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는 사자가 있는 상황 속에도 기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불 시험 속에서도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고난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숨겨진 보물을 찾고 생명을 찾는 자들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베드로전서는 죄가 그친 삶의 모습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4:11)’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찬양하고 이 예배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 예수의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열두 번째 돌을 찾는데 하나님이 공동체의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 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데 노량진교회 박OO목사님이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면서 120만 원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게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뭔지 정말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달 사례비 보다 더 많다고 했더니 12만 원만 내라고 하셨습니다. 오면서 내가 왜 12만 원을 내면서 그 얘기를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까 그 목사님 말씀에 뭔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얘기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시고 알려주는 이유는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쓰라고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설명을 하고 너무 많이 변명해야 하고 사람들한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야. 하나님 것이야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저 사람 너무 나가는데?’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처럼 하라고 하십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반드시 옵니다. 고난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고난 가운데서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희망을 말하고 사람의 의지를 얘기합니다. 그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있어 보입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확신 있게 얘기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긴가민가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긴가민가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믿음을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습니다.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봉사하는데 힘이 남아돌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셨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고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고 어떻게 봉사를 하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매일 자신의 희망과 자기의 말과 자신의 것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자신의 것이 다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울어도 매일 자기 때문에 울고 기뻐도 매일 자기 때문에 기뻐하고 자기의 성공이 보이니까 희망이 보이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청빈한 부자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부자는 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가난을 얘기합니다. 자발적인 가난이든 청빈한 부자든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삶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4:13)’

내가 살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참된 즐거움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근거가 즐거움의 근거가 분명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4:14)’

영광의 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난을 뚫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영광과 우리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달리 우리는 예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영광의 영 때문에 부활하신 그 믿음 때문에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4:19)’

세 번째는 내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주님 앞에 맡깁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신데 내가 왜 여전히 절망 가운데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이 하셔야지요.’

창조주께 맡기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몸을 위탁하고 내 일을 위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기를 원합니다. Meres 든 눈병이든 우리를 모으는 것을 세상은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사람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거짓 희망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도 잃을 수 있고
물질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평판도 자존심도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희망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괜찮은 사람, 성공한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내 존재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귀하다는 생각
내 계획과 꿈과 비전과 목적이 있다는
헛된 꿈 거짓 꿈 허탄한 말
이 망상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내가 아파하고 애곡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의탁하는 삶으로 살겠노라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6. 7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