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욥기 5:1-27, 사도행전 18:24-28)

엘리바스가 5장 전체를 통해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악한 자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절부터 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악인이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부리는 천사도 거룩한 영도 우리를 도와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자도 없고 구원 받을 자도 없다고 합니다. 욥의 분노와 시기는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4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악인을 도와줄 필요가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재난과 고생은 반드시 불꽃이 있기 때문에 불이 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행위의 결과일 뿐이지 누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8절부터 16절까지에 있는 말씀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해결책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우리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스스로 입을 다물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17절부터 27절까지에서는 징계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17절)’

고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고치시는 과정 과정 마다 언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언약을 맺는 하나님의 뜻대로 화목하게 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5장 1절부터 27절 까지 엘리바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말씀 하나하나가 옳습니다. 그리고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말씀에 보면 욥기 5장 13절을 조금 바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인데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관점인데 그것을 고린도전서 3장 19절은 약간 비틀어서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엘리바스의 말이 다 맞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 욥은 징계 받을만한 사람이고 징계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한테 의탁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부족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엘리바스의 말에 동조하고 동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욥기 전체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논리, 그가 가지고 있는 입장도 알고 있습니다. 욥에게 문제가 있다고 계속 비난하고 있고 정죄하고 있는 엘리바스의 입장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말은 너무나 지당합니다. 말은 정말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할 때 마다 하나님이 어떻고 성경 말씀이 어떻고 기도하라고 하는데 약간 찝찝한 느낌이 오는 경험이 있습니다. 분명히 맞는 것 같고 하나도 틀린 말이 없고 성경을 보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는 틀린 말이 아니고 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공감할 수 없습니다. 뭔가 찝찝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오늘 그 답을 사도행전 18장에서 찾았는데 아볼로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24절)’

알렉산드리아는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로마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가 도서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이 위치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든 철학적인 논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됐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교육도시 또는 지혜와 지식의 도시였는데 그 곳에서 태어난 아볼로였습니다.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24절)’

말발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능통했습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말을 잘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별 내용이 없는데 말씀을 정말 너무 구수하게 하십니다. 머릿속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학 시간에 설교자는 첫 번째로 말을 잘 해야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성경에 대해 잘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쩌면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한테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인데 말 자체가 무너지면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성경도 많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25절)’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에 있는 성경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25절)’

거꾸로 말해서 성령의 세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6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도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볼로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99가지는 맞는 것 같은데 한 가지가 비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할 수 있는 뭔가 하나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가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른다고 결론을 내리고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말해줍니다. 평신도가 목사님 설교를 듣다 보니까 하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데리고 가서 성경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 기꺼이 그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볼로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서 말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9:1-2)‘

아볼로파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파가 있고 아볼로파가 있고 게바파가 있고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아볼로파가 엘리바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하나님께 위임하고 위탁해야 하고 하나님은 상처를 주시지만 반드시 싸매서 그들을 회복시켜주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절)’

아볼로파는 철저한 지식파입니다. 그래서 아볼로파는 항상 칠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 와서 칠판 치우고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방언과 예언이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또 다른 신비입니다.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 또 다른 신비입니다. 1+1=2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아볼로는 하나님은 이렇고 이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 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릎 꿇으라고 하고 기도하니까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말도 안 되는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합니다.

방언이 성경적인 것이냐 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아주 보수적인 장로교는 방언은 이미 초대교회 때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즘 아주 유명한 성경공부의 대가 한 분은 ‘다우아라 다아다라 다비다라’ 라고 해놓고 해석해 보라고 합니다. 아무도 해석을 못하니까 그렇다면 방언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대형교회 원로목사님께서 하신 방언을 글자로 써놓고서 해석해 보라고 하고 아무도 못하니까 방언이 없다고 합니다.

방언은 구원의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하나님의 입술로 찢어놓으신 것입니다. 내가 아, 버, 지를 말할 때 ‘아’ 하려면 입을 벌려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로 바꿔버리십니다. 내 입술을 주장하십니다. 아볼로는 정신이 번쩍 들고 이성으로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브리스길라와 아볼로가 와서 성령이 없으신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으니까 무릎을 꿇으시라고 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볼로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이성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계의 모든 것들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방언도 받고 예언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모든 종교는 다 자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 자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보니까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안 되니까 해 봐야 합니다.

제가 정말 늘 작심삼일 합니다. 성질이 나면 성질나는 대로 부립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설교 때 목사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라고 하셔서 그 말씀에 찔려서 오래 참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부흥회 강사목사님께서 저희 교회 권사님들 만나시더니 다들 너무 착하시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인 제가 가장 못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괜찮게 살아보자, 목사답게 좀 살아보자 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도 하고 선한 목자처럼 위로해 주고 싶은데 제 성질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니까 안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관념은 내가 열심히 하고 내 마음을 바로 잡고 내가 뭔가 해보려고 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할수록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인데 그 율법 때문에 죄가 틈이 돼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자기 스스로를 죽이고 계속 죄책감에 빠져있고 자책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나니까 입조차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무너졌다면 하나님이 다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주저앉거나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정죄하고 있거나 내가 그것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이 성령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기도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온유와 겸손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대로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결심하고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도 내 의지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내 입술을 움직이시니까 ‘다다다다 버버버버’라고 하는 기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입술조차도 주님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을,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그 언약 때문에 내가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엇인가 보입니다. 그것을 말하니까 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끔 제가 손을 대면 병든 사람이 벌떡벌떡 다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꿈을 꿉니다. 목사님 손이 능력의 손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손을 댔는데 병이 나았다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선교지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도 붙여주시고 물질도 붙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비전만, 약속만 가지고 갔는데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만 두고 나오라고 하시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일구었는데 내가 어떻게 만든 것인데 하고 못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할 때 자기 재산을 다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청소도 하고 모든 일을 다 하면서 고생고생 했는데 후임자는 청소도 안 하고 희생도 안하는 것 같고 설교만 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불쑥 왜 그 사람에게 교회를 물려줘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셨답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줘야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 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했다고 해서 서지 않고 내가 무너졌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그 믿음 때문에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가 욥을 볼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를 잘 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을 정죄하고 싶습니다.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신학적인 정리도 잘 되어있고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욥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쌤통’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잘 나갈 때 정말 배가 아팠던 것입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자기도 배가 아팠는데 어느 순간에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가서 위로해줘야겠다고 말하는데 가서 조목조목 왜 쓰러졌는지를 파고 있는 것입니다. 다 지당한 말씀이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하시는 것에 대해서 모릅니다.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그냥 하나님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제 인생,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충청북도 음성 깡촌에서 태어나서 다 늙으신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났을까를 볼 때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보면 저주입니다.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난 다른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저는 저주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인생인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너, 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가 노력해야지 예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나도 죽었다고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그렇게 보지 않으면 계속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내가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있는데 100% 받아들이고 살면 예수그리스도로 사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살아내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50%만 믿으면 예수에 관해서 들으면서 예수로 살다가 말다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정말 놀랍게도 욥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는 것은 자기모습, 자기 안에 있는 모습을 봤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 중에 하나가 예수님도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배고프셨습니다. 예수님도 열 받아서 성전을 뒤집어 엎어버리셨습니다. 빌라도의 고백이라고 하는 책자에 보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게 되는 계기가 성전을 뒤엎은 사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후회하고 또 그렇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 속에 하나님의 신성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고통당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셔서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T.V를 봤는데 아주 재미있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연애코칭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보다가 연애 그냥 하면 돼지 코칭 까지 받아야 되나? 하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성령을 받으려고 또 성령을 연구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경험이 반드시 있습니다. 세상의 신들도 만나야지만 힘이 있다고 하는데 예수를 만나는 것도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직접 만나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만난 예수를 말로 전하는 것에 너무나 큰 한계를 느껴서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근사한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다섯 가지의 변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불같은 성령이 오시면 원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죄의 소멸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에 대해 공부를 해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죄에 대해서 매일 아파하고 슬퍼하고 넘어집니다. 그런데 불같은 성령이 내게 오시면 그 죄가 깨끗하고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를 묵상하지 않습니다. 죄를 보고 연구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물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그 물은 이른 비와 단비와 같이 생명력이 있어서 성령을 받으면 힘이 생깁니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다시 주시는 하나님의 근원의 힘 때문에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전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세 번째 바람과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바람은 임의로 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네 번째 비둘기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내 인격이 온유와 겸손으로 변화됩니다.

다섯 번째 기름과 같은 성령이 내게 오시면 구별되고 분별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종교는 내가 죄를 소멸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고 내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 무엇인가 깨달아야 되는 것이고 내가 자유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배워야 되는 것이고 온유하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것이고 내가 구별하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배워야 되는 것인데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정확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성령을 모르니까 그것조차도 또 다른 율법으로 또 다른 지식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내 마음 가운데 임재하신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동의하고
주님 앞에 위임하고
주님 앞에 위탁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마음을
주님 앞에 그대로 맡기는 기도를 함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2. 1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