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환 상 (욥기 4:12-21, 고린도전서 1:18-31)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가장 왕성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실제적인 은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또 어떻게 조합을 이루고 연합을 이룰 것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연합과 하나 됨을 이루는 것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16가지의 은사가 있고 또 네 가지 유형의 파가 있었습니다. 이성주의자, 신비주의자,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 바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룹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들이 하나 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의 핵심이 바로 23절 말씀입니다.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복음의 핵심이고 복음의 내용이고 복음의 전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과연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것이고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가장 기본적인, 가장 근원적인 복음을 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특별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비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신비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는 신비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실제로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는 이 현상 속에서 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단어가 또 이 내용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와서 함께 제사를 드리려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또는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니까 혹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내려와.’ 그리고 사람들은 엄청난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전쟁이 나면 국회의사당에 동그란 지붕이 열리고 로봇 태권브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설마 하나님이 설마 자칭 그리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하면서 분명하게 그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려서 빛이 십자가가 위로 올라가든지 아니면 그 주위에 있던 로마 병사들을 예수님의 능력을 가지고 다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적을 바라고 있는, 표적을 바라고 있는, 어떤 싸인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걸림돌이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악인들이 활보하고 악인들이 판치는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 악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분이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할 때는 영광의 그리스도로 말했습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말했습니다. 교회간판에 보면 무슨병, 무슨병, 무슨 병을 치료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처럼 병원 보다 더 병을 잘 고치를 수 있다고 선전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사실은 기적을 바라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말하고 싶지 않은 영업비밀입니다. 어둠은 지워버리고 늘 빛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싸인을 기다리고 기적을 바라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걸림돌이 아니라 헬라인이라고 하는 지혜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었습니다. 원래 지혜라는 것은 딱 떨어져서 단순하게 그것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얻는 것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마늘을 먹든지 동굴에 가서 무엇인가 깨닫든지 40일 금식을 몇 번을 하든지 하늘에 대해서 그림이 그려지든지 대단한 것을 경험하고 대단한 것을 설명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혜자가 바로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 한 분만이 구원자이고 예수라고 하는 그 이름이 능력 있고 예수라고 하는 그 분만이 오늘 우리에게 유일한 답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풀려고 합니다. 그냥 예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 왜 저렇게 미련할까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미련함 속에는 또 다른 원리가 있고 또 다른 논리가 있습니다.
지혜자가 추구하는 것이 비교하고 경쟁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지혜의 목적이 내가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지혜를 가지고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너무나 미련하기 때문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나의 자랑은 미련하다고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만이 나의 자랑입니다.’ 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서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것이 나중에는 공격의 빌미가 될 텐데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통해서 나를 드러내야지만 참된 지혜자인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자들 또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주의자들 그들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걸림돌이고 그것이 미련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까?
우리 안에 신비를 추구하려고 하는 또 다른 나와 계속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풀려고 하는 이성주의의 지혜를 구하는 내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사도바울이 얘기합니다.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우리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 어떤 기적을 바라는 것에 대한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하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 그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서 그 부르심에 복종하고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은 존재,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구속함이 늘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고 하나님 때문에 의롭고 하나님 앞에 지혜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오늘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에 기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알 수 없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표적과 지혜라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그것은 세상이 볼 때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서 볼 때는 지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지혜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31절까지 보면 세 가지의 표적과 지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 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 보다 강하니라.’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의 힘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능력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사람의 지혜 보다 낫고 우리가 가장 연약하다고 얘기하지만 어떤 것 보다 강한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논리가 판을 친다고 할지라도 1%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99%는 1%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안타까워하면서 그 1%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망할까봐 전기도 아껴 쓰고 수돗물도 아껴 쓰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99%는 없으니까 매일 당하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아니하고 아니하고 아니하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세 번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전도’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도가 십자가의 도입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가 그 섬김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조차도 말끝 마다 세상의 논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어도 하나교회 잘 나갈 수 있다는 것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런 교회를 꿈꿉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고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연합하고 지체로써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 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전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욥기 4장 1절부터 11절에서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인과응보를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사고가 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면 분명하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또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암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부모의 죄도 아니고 나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그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신비입니다.
또 다른 신비가 있다고 얘기할 것 같으니까 12절부터는 엘리바스가 영의 이야기를 합니다.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뭔가 느껴졌고 어떤 환상을 봤다는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 보다 의롭겠느냐? 고 말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고 느낌으로 얘기합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보다 의롭고 창조하신 이 보다 성결할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고 모든 것, 천사조차도 미련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비의 체험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세상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죽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엘리바스가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영적인 체험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어떤 사람이 해줬다는 예언의 내용을 녹음해서 들려줬습니다. 쭉 듣고 나니까 평상시에 제가 얘기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예언을 한다고 하면 뭔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지금 왜 이 환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지 않든 사람 보다 하나님이 더 의로운 것, 누구나 압니다. 하나님만 빼놓고는 다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바스가 이 환상이나 예언을 말하는 것일까요?
부부싸움을 하면 첫 번째로 하는 얘기가 ‘세상 사람들한테 한번 가서 물어봐,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봐, 누가 맞는지.’ 라는 말인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토를 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한테 환상을 보여주고 영적인 세계를 통해서 이야기하신 것이기 때문에 변명도 할 수 없고 설명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만 하나님이 특별하게 가르쳐준 은사, 환상을 가지고 너에게 특별하게 얘기해 주는 것인데 너는 죽어도 싸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변명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987년도에 대구에 지하철이 있는지 없는지를 내기를 했을 때 제가 졌는데 진 이유가 대구에서 지하철을 타봤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은 것인데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 대구에 지하철이 있어.’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정말?’ 그러면 ‘넌 믿음이 없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장로님하고 목사님이 싸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부인이 환상을 보는 분이었는데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이 교회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와 싸울 때 가끔 성경말씀을 들이대는데 제 아내는 항상 하는 얘기가 하나님 말씀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마지막 무기가 말씀인데 엘리바스도 똑같은 것입니다. 환상과 비전을 봤는데 인생은 다 악하고 인생은 신뢰할만한 존재가 없고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프고 힘든 욥에게 그 말은 ‘이제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구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일이 벌어졌는데 다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했습니다. 그랬더니 분열이 일어나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정말 너희에게 그 사랑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제 아들과 딸이 싸울 때면 늘 엄마 아빠를 핑계를 댑니다. ‘엄마가 나 보고 싶은 거 보랬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고린도교회 사람들도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말 사랑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 때문에 절제할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에 스스로 메인바 되어서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그 생명 때문에 내 기질이 이렇고 내 삶이 이렇지만 내 기질도 죽고 내 생각하는 삶의 태도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도 아니고 원리도 아닙니다. 그것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원칙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칙이고 그것이 법인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라고 합니다.
엘리바스의 이야기가 진짜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환상과 비전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맞지만 그것을 쓰고 있는 엘리바스의 태도가, 말이 틀린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염치가 없고 이성주의자들은 눈치가 없습니다. 염치가 없다는 말은 예의도 없고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아무데서나 벌러덩 드러눕습니다. 입신을 하면 아무데서나 드러눕고 난리를 칩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할 때 갑자기 춤을 춥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를 시작할 때부터 춤을 추고 설교할 때도 춤을 춥니다. 참으라고 하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왜 말리느냐고 합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특별히 신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목사도 없습니다. 질서도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우습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천사가 안내를 하는데 어느 방에 가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한답니다. 왜냐하면 장로교 교인들만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로교인들은 자기네만 구원받은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한테만 나타난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어주시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은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주의자들은 눈치가 없습니다. 눈치가 없다는 것은 상황을 모르고 때를 못 맞추는 것입니다. 그들은 틀렸다고 콕콕 찌릅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합니다. 설교를 분석하면 99.9999%가 이단입니다. 그런데 분석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은 받고 받고 싶지 않는 것은 ‘삑, 삑, 삑’하고 걸러냅니다. 삑 소리가 덜나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소리만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주의자들입니다.
신앙은 신비와 이성이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염치가 없어지면 안 되고 어느 순간에 눈치가 없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이 사랑과 절제와 연합을 얘기합니다. 저는 예전에 교회를 굉장한 선교단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기도하고 바로 응답받아서 돌격하고 기도하면서 서로 물질도 나누고 그런 일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꼴찌들이 쫓아오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꼴찌로 달리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이 데리고 들어오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는데 우리 안에 연약한 자 쓰러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 때는 달려가다가 멈춰야 합니다. 일으켜서 같이 뛰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환상과 비전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절제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앞에 환상을 보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그 환상은 반드시 현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환상의 신앙입니다. 환상, 비전, 신비는 반드시 내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비전을 보면 그 비전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현실, 내가 가지고 있는 실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삶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열 시간 동안 환상을 보고 기도를 했다면 실제로 내 성품이 바뀌어야 합니다. 실제인 내 말이, 실제인 내 삶의 패턴이, 내 삶의 습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비와 현실을 연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신비주의자들은 뭔가 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붕붕 날아다니는 도인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신비주의자는 신비를 말하는데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보인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저 사람이 혹시 나를 조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가끔 저도 보이는데 함부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주 확연하게 보일 때가 있는데 조종하지 않으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신비가 어떻게 현실과 내면과 내 삶의 모습과 연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환상은 예수를 전하라고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라고 신비를 환상을 기도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찌질하고 아무것도 없지만 그 속에서도 내어주는 삶이 진정한 영원한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비에 현혹되어서 신비주의로 빠지지만 그 신비 안에 예수가 없습니다. 내어주는 삶, 헌신하는 삶,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는 자기부인의 삶, 그 예수의 삶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은사가 은사 자체로써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수단이고 통로입니다.
세 번째 환상을 보고 나를 고치는 것입니다.
나를 고치는 환상이고 나를 고치는 신비입니다. 나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주신 것이고 나를 바꾸기 위해서 그 일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환상을 환상대로 쓰지 않고 나를 바꾸고 나를 만드시기 위해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절제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과 환상과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쓰고
그것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절제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꾸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겠노라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