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다 네 손에 맡기노라 (욥기 1:6-12, 고린도전서 3:10-15)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말씀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이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과 협상을 하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는데 사실은 우리가 욥기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사탄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시험을 주십니다.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이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사건, 상황, 사람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 어떤 때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는 유대인들이 얘기하는 것이나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있는 존재입니다. 그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왜 천사가 그렇게 약해졌느냐 하면 그것은 히브리서 1장에 있는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마다 나에게 맡겨진 일은 수호천사에게 맡긴다고 하는 구약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 보다 더 뛰어나신 분,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분은 내 안에 계셔서 천사 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믿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내용에서는 천사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Temptation이라고 하는 유혹을 주십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것은 죄로 시작한다고 얘기합니다. 죄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에 끌려서 미혹이 되고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유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Test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서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Temptation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죄의 묵상을 하기 때문에 죄가 어느 순간에 나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터가 생기기 전에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터를 닦을 것인 생명의 터를 닦을 것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터로 삼을 것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세계를 터로 삼을 것인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3장 10부터 읽은 이 말씀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터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터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예수그리스도의 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터 가운데 무엇이 있느냐 하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할 것인지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고린도전서의 말씀에 의하면 불이라고 하는 것을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불을 견디고 이기는 것은 남는 것이고 그 불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불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유혹은 없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시험, Test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이 잉태해서 그 욕심을 통해서 내가 죄를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예수그리스도의 터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인해 우리가 유혹에 빠져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터는 이미 닦아졌는데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불에 태워져서 불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은 통과할 수 있는 Test로 주시고 어떤 것은 내 욕심으로 인해서 통과하지 못하는 Test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Test이고 유혹은 없습니다. 유혹으로 시작해서 Test로 끝나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때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다 Test,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서 Test를 계속 해서 주시는데 그 Test가 바로 불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욥을 향해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인정합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욥을 향한 인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 다른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다시 증거하는 증인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존재로 욥을 세우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이후에 영원한 삶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라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은 오늘 나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고 영원히 단일을 이루기를 원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욥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욥을 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 되어 함께 있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불시험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악신과 선신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악하고 절망스럽고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것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국무총리 후보였던 기독교 장로님이 일제 강점기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랬고 함석헌씨라고 하는 분이 쓴 책에 보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당한 사건과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셔서 사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도 쓰시는데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냥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강자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맞느냐? 아닙니다. 바로를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도 세우셨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강팍한 마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냐? 아닙니다. 모세는 바로를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말렸습니다. 특별히 예언자가, 선지자가 그곳에 가면 잡힐 수밖에 없으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실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더 큰 뜻은 로마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나라를 팔자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할 때 모든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벨론 쪽에서는 예레미야를 자기네 편이라고 대접해 줄 테니 와서 한 자리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고통당하고 고난당하고 있는 백성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난 가운데 있겠다고 합니다.

함석헌씨가 쓴 <스스로 보는 한국역사>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민족 가운데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같이 고통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사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이라고 하는 큰 뜻을 보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운명론자로, 숙명론자로, 기득권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불이라고 하는 시험을 주십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늘 불을 통과시키실 것입니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불은 분리시킵니다.
다 녹여서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리시킵니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올 때 마다 질문을 하게합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가?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데 이렇게 슬픔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것인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것이 불시험입니다. 불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합니다. 분리시키고 질문하게 할 때 마다 ‘그대로 있으면’, 금과 은과 보석은 분리시킬 때 마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풀과 나무와 짚은 다 타서 없어집니다. 내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늘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쓰러지거나 없어지거나 그 속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으면’, 이것이 불의 시험입니다.

두 번째 불은 견고하게 합니다.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시험을 통과할 때 마다 확신이 있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에서 누가 남아있는가? 마지막에 남아있는 것이 진짜입니다. 지금까지 희미하게 보였던 것들이 그 날이 되면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불이라고 하는 시험을 통과할 때 마다 남아있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입니다. 불시험을 당할 때 마다, 내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정말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진짜입니다. 불시험이 있기 전에는 다 나에게 잘 해줄 것 같습니다. 불시험을 통과해야 확신이 생깁니다.

세 번째 불은 우리를 드러내십니다.
드러나서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의 특징은 불을 통과할 때 마다 가지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더 찬란하게 빛납니다. 더 멋있게 보이는 것이 불의 통과입니다.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합니다. ‘아 그거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런 것이었구나. 그게 맞았구나.’ 라고 하는 것이 불의 시험입니다. 결국에 그 감탄이 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뛰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저보다 못된 아이들이 선행상을 받는 것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시던 어떤 목사님이 학생은 공부 잘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하셨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기준이 다른 것인데 결국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 통과할 때 마다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은 우리를 드러나게 합니다.

욥기에서는 불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늘 물리쳐야 되고 늘 대적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허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를 단련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탄하고 하나님이 같은 편인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늘 사탄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인줄 알았는데 숨어있는 동업자입니다. 우리를 단련시키시기 위해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탄을 사용하십니다. 내버려두심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하고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자랑하지 않으셨으면 욥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 봤니?’ 라고 물으시니까 사탄이 ‘걔는 하나님이 잘해주시니까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하나님 믿는 것일 거예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 네 손에 맡기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탄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과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데 사탄이 방해꾼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리고 발목을 잡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오해와 분열과 거짓을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가 사탄이라고 하는 존재, 영적 실체가 우리의 마음을 거짓과 분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질문하게 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에 보면 금과 은과 보석의 건축에 관한 시험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의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하시면서 불을 통과시키는데 그 안에서 사탄이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습니다. 사탄은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사탄은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탄이 권세와 능력으로 사람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허용하셔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능력과 권세는 없습니다. 불시험에 들 때 마침표를 찍고 느낌표를 찍고 있을 때 사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탄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보고 있어야지만 우리가 영원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 1장 6절부터 12절까지에는 사탄의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입니다.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경외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 사탄의 질문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내 옆에 있는 내 배우자가 또는 함께 살아야 되는 내 지체들이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함께하게 하신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살아야 되는 이 직업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갖게 된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말이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자는 그냥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데 그 하고 있는 일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라면 만약에 이유가 없어지면 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유도 없이 그냥 너무 좋아서 나무 신나서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이유 없이 까닭 없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탄이 질문합니다.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네 손에 맡기리라.’ 하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전서에 있는 말씀처럼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터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맡겨도 그 터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흙에 하나님의 생기를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마고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쫓아갈 수 없는 또는 근본대로 본질대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니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답입니다.

헨리나우웬이 쓴 책에 보면 어떤 수도사가 인도의 겐지즈강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데 전갈이 떠내려가면서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수도사가 그 전갈을 집어서 살려주려고 하니까 전갈의 수도사의 손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놓았다가 또 다시 전갈을 집어 올립니다. 그러면 전갈은 또 찌릅니다.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수도사를 헤하고 죽이려고 하는 전갈을 굳이 왜 살리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도사가 전갈은 찌르는 것이 본능이고 자신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능이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단일을 이룰 수밖에 없는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나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신랑이라고 부릅니다. 놀라운 이 신비를 우리는 왜 일까? 하면서 이유를 계속 찾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하나님과 단일을 이룰 수밖에 없는 본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 있게 사탄의 손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와 그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아니 당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라고 사탄이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무엇인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대가를 치르신 사랑이었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 그자체로 두려움이 없는 사랑으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 네 손에 다 맡기리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는 사람 없습니다. 채찍으로 맞으면서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좋은 사람 없습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묵묵히 견딜 수 있을만한 그것조차 두려움이 없을 만큼의 힘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 자학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잘못하면 40일 금식해야 된다고 자기가 값을 치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하면 하나님한테도 찍힌다고 찍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노예의 근성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늘 노예의 근성으로 반응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뒤에 서 있고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벼랑 끝에 서는 용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입니다.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가시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막아버리면 사람들이 모욕과 수치를 준다면 분명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욕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고 나에게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주셨는데 위에 계셔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도 내가 주님을 만나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관계가 있습니다.

요즘 중학교 친구들을 밴드를 통해서 만났습니다. 중학교 때 한 학년이 16반까지 한 반에 70명씩 총 1200명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 200명 정도가 밴드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 중학생입니다. 40이 넘어 50이 다 됐는데도 ‘나 쟤 싫어.’ 하면서 갑자기 밴드에서 우르르 탈퇴합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또 다시 우르르 들어옵니다. 다 중학생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인데 중학생 같은 그 모습들이 너무 편한 것입니다. 중학교 친구와 대학 때 만난 친구와 또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정말 다릅니다. 제게도 제일 친한 중고등학교 친구가 있는데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아무 말 없어도 그냥 친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존재이십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자라왔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공감했던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마음에 안 들고 지금 당장 섭섭해도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화가 나고 내가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사업을 할 때는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늘 시험을 하고 섭섭하면 ‘이 사람은 아닌가보다.’하면서 자릅니다. 그런데 내가 깊은 관계를 하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은 어느 한 순간의 감정 때문에 함부로 치지 않고 함부로 단절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분명히 욕을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 앞에 정직했던 늘 하나님과 모든 것 가운데에서 교제하고 늘 묻고 들었던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사건이 오고 무슨 상황이 오고 누가 온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욕하지 않을 욥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로 성숙해지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의 마음. 오늘 이 세 가지를 늘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까닭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소유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편하고 싫으면 욕하는 관계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오늘 이 시간 사탄이 했던 이 질문을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에서 잘 통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은 잠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방에 우겨쌈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우는 사자와 같은 존재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리와 늑대와 전갈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날마다 광야로 사막으로 우리를 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시험 Test입니다.

그 시험 가운데 후회하고 다시 돌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갈지자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허공에 주먹질 하는 인생이 아니라
푯대를 향해서 분명하게 걸어갈 수 있는
우리들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우리의 믿음을 결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이 나에게 모든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복을 다 가져가셨어도
내가 그 복과 저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살겠습니다.

주님! 내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마다
스스로 고립되고 스스로 쳐내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하고 견고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겠습니다.

201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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