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기 2:1-6, 마태복음 6:25-34)

며칠 전에 T.V에서 <일대종사>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일대종사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엽문이 이소룡에게 가르쳤던 권법이 영춘권이었는데 영춘권은 여자의 권법입니다.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고 가능하면 손으로 모든 것을 다 해서 최소한의 움직임을 통해서 적을 치는 권법입니다. 머릿속에 남은 그 영화의 한 장면은 여자가 홍콩에 있다가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엽문이라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무술인은 나를 보고 하늘을 보고 중생을 본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의 삶, 신앙의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나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나의 자화상,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는데 거울 속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이 하늘입니다. 내가 왜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왜 가장 존귀한 존재인지를 묻기 시작하니까 그 물음 가운데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만드신 존재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다보니까 하늘을 보게 되고 그리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중함을 아게 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거꾸로 입니다. 사단은 자꾸 사람을 보게 합니다. 사람을 보게 하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말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 불만입니다. 그리고 다 원망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나에게 붙이셨을까? 내 팔자가 왜 저런 사람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팔자가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신의 모습이 초라합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진리는 나를 보게 하고 하늘을 보게 하고 사람을 보게 하는데 사단의 전략은 사람을 보게 하고 하늘을 보게 하고 거기에 나를 반영하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무술인입니다. 영춘권 보다 더 쎈 그리스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똑같이 사단이 욥을 치는데 1장의 침과 2장의 침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1장의 시험과 2장의 시험이 다릅니다. 1장의 시험은 외부적인 사건을 계속 일으켜서 욥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빼앗기게 하는 시험을 줍니다. 사단은 계속 사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 환경을 보게 하고 사건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에게 무너지라고 얘기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전쟁터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최고의 공격이 염려입니다. 사건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있기 때문에 사람 때문에 늘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가 없어서 염려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염려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사건 이후로 아이들이 다 수영을 배웁니다. 염려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땅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서 공중부양을 배워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야지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서 담벼락이 무너지는 사건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죽을 것에 대해서 준비하는 사람은 나 죽는다고 하는 순간에 죽을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행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신호등 앞에 차가 서 있다가 갑자기 덤프트럭이 들이받아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내 생명 때문에 몸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염려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에 대해서조차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공중의 새도 있고 백합화도 있고 들풀도 있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더 먹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잘 입고 그래서 생명이 연장된다면 염려할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생명이 연장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가 평생 먹을 양식을 창고에 쌓아두고서 이제는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염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늘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사람 또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나서 염려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늘의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아들입니다. 고아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 그런 생명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더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믿음의 능력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물질의 적음을 통해서 마음이 강팍해집니다. 미래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앞으로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경제적으로도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세상은 더 강팍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정이라는 것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늘 경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마음인지 보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나라와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정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신뢰하고 맡겨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면 염려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어가 아니라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스스로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 염려와 싸우는 것입니다. 염려와 싸우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염려는 없습니다. 죽을 것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염려는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으면 늘 사람은 염려 때문에 머리를 쓰고 계획을 짜고 무엇인가 만들어냅니다.

1장의 시험은 사건을 보여주면서 욥이 과연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장의 시험이 또 있습니다. 2장에서는 사단이 와서 직접적인 시험을 합니다. 이제 내면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진짜인지를 묻는 몸을 치는 시험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삼일은 그 자리를 지킵니다. 또 내가 정말 아프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있을 수밖에 없는 내 삶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일어나고 상황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이 온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치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그것조차도 힘들다고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울고 있습니다. 사단이 이제는 상황이 아니라 욥을 직접 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시험입니다. 간접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제는 직접적인 사건을 통해서 욥을 시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하는 사단의 두 가지의 전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단이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대적합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욥 2:4)’

영어로 얘기하면 skin for skin입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단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는 아주 당연한 인과의 법칙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되는 또는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에 나에게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삶의 행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태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느냐하면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잃어버릴 정도로 그것에 집착하고 삽니다.

사단이 하나님 앞에 대적하며 하는 말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까닭 없이 사랑할 수 없는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할 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면 당연히 미워해야 되고 당연히 원망해야 되는 원수인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면 사랑하는 것 같고 잘 못해주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에서 사단이 까닭 없이 이유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겠느냐고 말합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에 해당하는 것을 다 가져가면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인간의 본성은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수의 손에 죽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산 속에 들어가서 스승을 만나 무술을 연마하고 원수를 죽이러 갑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기 인생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삽니다. 미워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누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사단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skin for skin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랑의 존재가 아니라 미움의 존재이고 미움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건드리는 순간에 그 미움이 불현 듯 나타나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똑같이 와서 이유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사단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수련회를 제주도로 가자고 했을 때 교인 중에 한 명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왜 꼭 제주도에 가시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이 좋아서라고 대답을 하면 물 좋은 곳 있다고 얘기하려고 했고 관광할 곳이 많아서라고 대답을 하면 관광할 만한 다른 곳을 얘기하려고 준비하고서 전화를 했는데 제가 ‘그냥’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로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유를 부여합니다. 이래서 사랑할 것이고 이래서 사랑하는 것이고 이래서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다 없어질 사랑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학력도 미모도 성품도 다 평준화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아침에 남편이 눈 뜨는 것조차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 뜨는 것도 싫다고 해도 어쩌면 우리는 그것조차도 뛰어넘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뭔가 이유를 찾지 않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을 통해서 욥이 하나님 앞에 받는 보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그냥 너 한 번 해봐 라고 하셨지만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모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전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숨겨진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과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 있습니다. 저는 그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의 전쟁터에서 진정한 마음의 보물을 찾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찾는 자의 삶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뼈와 살을 뛰어넘는 존재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단은 욥의 뼈와 살을 치겠다고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병에 걸린 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욥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통해서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는 뼈와 살을 뛰어넘는 존재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뼈와 살이라고 하는 존재를 뛰어넘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실제상황입니다. 내 모습을 뛰어넘지 않으면 나를 보지 않으면 나의 정체성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즐겁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공부하면서 가끔 사람들한테 거울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라는 적용점을 줍니다.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매일 인상 쓰고 모든 불만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늘 마음의 상이 무너져있고 찢어져있고 갈라져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수 있는, 보고서 마음이 치유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습 의외로 괜찮습니다.

두 번째 나를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원수는 하나님 앞에 맡기고 더 사랑할 존재를 찾으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원수의 눈에 눈이 빠르지 않고 원수의 말에 귀가 빠르지 않고 원수를 죽이는데 내 발과 손이 빠르지 않고 원수를 향해서는 느릿느릿,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빨리 더 성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도 소유도 묻지 말고 생명관계 안에서 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단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전략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구하지 말고 또 다른 소유와 능력을 구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기를 구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구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페이스북에 제가 이 시대의 기독교는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이나 장기기증이나 공개 입양운동 같은 것을 하며 살아야 된다고 글을 썼더니 목사들이 기독교가 제발 아무것도 안했으면 좋겠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도 오히려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답을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 욕망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가 무엇인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단은 계속 하나님이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데 그래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사랑은 믿는 것이지 소유도 묻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에 눈을 빼앗기거나 다른 소리에 계속 마음을 빼앗기거나 어떤 것에 집착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단이라는 영적실체가 있습니다. 그 사단이 와서 계속 우리에게 이유를 물을 것이고 계속 능력을 물을 것이고 소유를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라고 이 세상의 모든 영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 그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명은 해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염려하지 않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믿음으로 지켜내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정함입니다.
하나님은 정한 마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한 마음이 염려하지 않는 마음
믿음의 마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뼈와 살을 뛰어넘는 존재로
누군가를 원망하고 살지 않는 그 삶으로
이유도 소유도 묻지 않고
온전한 생명의 관계 안에서 구하고 살겠다고 하는
그 믿음의 정함이 우리들의 기도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말 그 생명의 관계 때문에
우는 자와 함께 울고
피리를 부는 자와 함께 춤 출수 있는
피리를 부는 자가 나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피리를 부는 자와 함께 춤을 추고
우는 자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그런 생명의 관계 안에서
구하고 살겠노라고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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