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알 몸 (욥기 1:13-22, 마태복음 13:24-30)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욥의 이야기가 너무나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루는’

13절 말씀에서 하루를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는데 하루라고 하는 시간은 처음과 끝이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없어지는, 모든 것이 죽음 가운데 있게 되는 그런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욥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시련이었고 그 죽음에 직면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지금 이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과 그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스바 사람이 소와 나귀와 종을 잡아가고 죽입니다.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서 양과 종의 죽음을 맞보게 합니다. 갈대아 사람이 와서 낙타를 빼앗고 죽이고 종도 죽입니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어서 열 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는 그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가 5백 마리, 암나귀가 5백 마리,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라고 욥의 재산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아들 일곱이 있었고 딸이 셋이 있었는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열 명을 모두 잃어버리는 엄청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된 것이 욥의 하루였습니다.

이해되지 않았고 설명되지 않는 죽음입니다. 이 이야기를 욥도 아니고 종도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첫 번째 욥의 신앙, 욥의 믿음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희생이 필요했을까? 그렇게 많은 죽음이 필요했을까? 욥의 신앙이 도대체 무엇인데 욥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대가지불을 하게 했을까? 그러면서 질문합니다. 그 죽음을 내버려두신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신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죽음을 막으셨어야 하지 않을까? 사단에게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지만 너무하지 않느냐고 막으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욥의 정신상태가 정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에’

마음을 추스르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전에 ‘말하는 동안에’ 사건이 계속 겹쳐서 옵니다. 그렇다면 욥은 아주 당연하게 달려가야 합니다. 자기 아들, 자기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첫 번째로 일어나서 했던 행동이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찬송합니다. 제 아들의 표현대로 하면 ‘바보 아니야?’ 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아들하고 더하기 게임을 하면 1+1=2, 하고서 100+100=? 하고 물어보면 제가 300하고 장난을 칩니다. 그러면 아들이 ‘바보 아니야?’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것처럼 욥이 정말 미친 사람 같습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달려가서 울어야 되고 까무러쳐야 되고 미치거나 실신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반응인데 욥은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세 번째는 욥의 생명이 모든 생명(죽음) 보다 소중한가? 하나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명이 한꺼번에 죽는 죽음이 있게 하는가? 욥이라는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그럴 수 있느냐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입장은 또 어땠을까요? 스바사람, 갈대아사람들이 와서 소나 나귀나 낙타를 빼앗아가고 종을 죽였다고 하니까 욥은 내가 그 때 스바사람 한테 좀 더 잘해줄걸, 내가 왜 그 사람들한테 잘못했을까? 그 때 갈대아사람들 한테 친절하게 할 걸. 갑자기 불벼락이 내리고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욥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도대체 무슨 죄기 있기에.’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만나고 특별히 죽음 앞에 서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그 때 그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89세에 돌아가셨는데 89년 사시는 동안 한 마디라도 부드럽게 할 걸. 하고 후회를 합니다. 막내여서 그런지 저는 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갑자기 반발심이 생겨서 ‘싫어’ 했습니다. 열 명의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은 그 부모의 심정은 정말 만 가지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식이 하나만 죽어도 땅에 묻지 않고 가슴에 묻는다고 얘기하는데 열 명의 자식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냥 그 이야기로 듣지만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만 가지의 생각이 들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 입장에서 더구나 그 집안을 치리하고 있는 아버지로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 42장까지 가야하는데 이 1장이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누군가의 공격이나 누군가의 소리에 결국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욥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더 괴로울 것입니다. 욥기 1장 13절에서 22절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지금 이 순간에 앉아서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은 죽음 앞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입니다. 다 장례식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정의를 또는 이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욥의 정신을 또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은 한 생명에 대해서 빨리 심판하지 않으실까? 라는 것을 생각하는데 오늘 그것에 대해서 마태복음이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비유를 연속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 고 하십니다. 비유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씨를 뿌린 사람 다시 말해서 그 주인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주인의 밭에 가서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행동이 저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에 원수라면 주인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거나 아니면 석유를 부어서 다 태워버릴 것 같습니다. 이것이 원수의 행동이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원수는 참 이상하게도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원수의 입장에서는 밭을 그냥 멀쩡하게 만들어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원수가 왜 가라지를 뿌렸을까? 그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에서는 소위 무엇인가 이루고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원수가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원수가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주인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손해를 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나빠져서 명예가 떨어지게 하려고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명예가 실추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먼저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씨를 뿌리고 뿌린 씨의 자리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가라지가 나올 수밖에 없다면 누군가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원수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에 종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원수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빨리 뽑으라고 얘기해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뽑지 말라고 ‘가만히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라고 대답합니다. 이 주인은 자신의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복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에게는 그 싹이 그 생명이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가 실패한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비난과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뽑힐까 두려워서 가라지를 가만히 두겠다는 것입니다. 초창기 싹이 날 때는 가라지와 씨가 비슷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종들이 뽑다가 덥석 씨를 뽑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나니까 30절에 세 번째 질문은 나오지 않았지만 종들이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언제 뽑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수확은 50%밖에 안 될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수군수군할 텐데, 실패를 경험해야 될 텐데 주인은 그것을 감수하고 그 생명, 그 싹을 귀하게 여겨서 50%의 생명만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같아서 가라지를 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무 깨끗하셔서 흐트러지고 먼지가 있는 것을 못 참는 분이시라면 그래서 이 세상을 다 청소하신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살아남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라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죄의 세상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에 묻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막과 같은 곳에서 살기 때문에 먼지와 티가 늘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함과 거룩함 앞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욥이 엄청난 사건 가운데, 죽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성경을 1장 1절부터 읽었지만 욥에게는 날벼락입니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이 180도 바뀌는 그런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그 속에서 막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추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욥의 10명의 자녀들은 소모품 같고 도구같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인생 가운데서 생각해보면 죽음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다 살지 못하고 옛말처럼 처녀귀신, 총각귀신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영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의 인생은 짧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영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 죽음이 슬프고 그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워할 수는 있지만 절망하고 스스로 죽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한 달 전쯤 저희 동네에 세월호 유족 한 분이 오셔서 마을 사람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 분은 절에 다니시는 분인데 절에 갔더니 스님이 ‘보살님 잊으세요. 좋은 데 갔습니다.’ 라고 하셔서 너무나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저한테 한 말씀하라고 하시는데 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하루의 행복을 우리가 누리고 있지만 그 하루가 어느 순간에 지옥 같은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상황 속에서 욥은 예배를 드렸을까? 욥의 자기 이해가 분명했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의 그 믿음이 알몸의 믿음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알몸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 사실은 없이 왔고 없이 가야합니다. 태아는 탯줄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탯줄이 끊어지면 죽을 것 같아서 그 아이가 탯줄을 잡고서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진짜 죽을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와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상태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입히신 것입니다. 옷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간다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위아래가 없고 죽음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얻으려하고 무엇인가 소유하려 애쓰는데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얘기합니다. 알몸의 신앙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욕탕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욥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은 여기에서의 인생이 나그네이고 순례자이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좋다고 여기서 승부를 보겠다고 집착하고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겠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우스갯소리 같지만 만나는 분들에게 ‘오늘 하루만 사실 수 있어요.’ 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음 주에 누군가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슬프고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슬프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내가 오늘도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오늘 내가 살아야 될 하루 이 하루를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죽음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되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계셔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실망을 할 수는 있어도 지나가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지향하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갑자기 기독교국가로 완벽하게 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얘기하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누구의 장례식이든지 장례식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이라고 하는 어두운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누군가가 죽으면 땅 위로 올라옵니다. 올라와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그 장례식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세상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찬송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이 볼 때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 슬퍼해야하는데 왜 노래를 할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든 어떤 사건이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것에 대해 반응할 수 있어도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승화시키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욥에게는 여호와하나님의 신앙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현재의 하나님, 하루의 하나님입니다. 어제의 하나님도 아니고 내일의 하나님도 아니고 오늘 하루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욥이 얘기합니다. ‘주신 것도 여호와시고 거두시는 것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이라.’ 여호와, 하루의 신앙 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와 오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욥이 반응했던 알몸의 신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알몸의 신앙은 첫 번째 겉옷을 찢는 신앙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겉옷은 속옷 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겉옷은 생명의 옷이었습니다. 겉옷을 찢는다는 것은 내가 의지하고 내가 보호받고 내가 안락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계획을 의지하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그 순간부터 또 다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은 내가 의지하고 신뢰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할 존재라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의지하는 순간에 배신과 배반의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은 내가 의지할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진정한 신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수간부터 사단은 계속 칩니다.

두 번째 머리털을 미는 신앙입니다.
나실인에게는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머리를 민다는 것도 머리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머리를 미시는데 자기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도를 닦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 친구 중에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눈썹을 밀었던 친구가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 상처, 내 의지를 주님 앞에 내어드려서 주님이 주인 되시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인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주인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건에 매몰되거나 어떤 사람에 매몰되거나 어떤 상황에 죽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아우성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찬송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으로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결정하고 하나님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와 찬송입니다. 이 예배가 우리 가운데 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예배입니다. 2천 년 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사건이 예배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힘들어지는 순간에 예배에 소홀해집니다. 예배는 도장찍기가 아닙니다. 예배는 취미생활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가인의 예배도 있고 아벨의 예배도 있는데 욥의 예배가 있습니다. 욥은 사건과 상황, 죽음조차도 보지 않겠다고 아주 단단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아벨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욥은 죽기 살기로 예배합니다. 이 알몸의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결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거룩함의 믿음을 주셨는데
그 거룩함은
나를 보호하고 있는 모든 것을 찢는 믿음입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원합니다.

겉옷을 찢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내 생각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조차도
그 모든 주재권을 주님 앞에 드리는
머리털을 미는 신앙으로 살겠습니다.

상황과 사건과 사람을 보지 않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는 것처럼
찬송하는 신앙을 갖겠습니다.

이 세 가지의 결단의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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