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종 기 (욥기 2:7-10, 고린도전서 9:17-27)

욥기에 주신 하나님의 큰 뜻은 창대에서 더 창대한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하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법칙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은 욥이 처음부터 창대했고 그 창대함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더 창대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성공한다. 노력하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인데 사실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이루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봐야지만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고 또한 욥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도 욥과 같은 사건을 통과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할 수 있는 꿈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단의 전략에 가장 쉽게 속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 두 가지 공격을 합니다. 먼저 사단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관계에도 이유가 있고 어떤 일을 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다면 최선을 다할 수도 없고 실제로 관계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단이 가지고 있는 전략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까닭 없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전략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가운데에서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시편 23편에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라고 하셨는데 상이라고 하는 것은 밥상을 말하는 것인데 왜 하필 그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실까? 저는 원수 앞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다시 생각해 보니까 원수라고 했을 때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을 묵상하지 않게 하시고 밥을 먹여주시는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하나님의 양식을 먹여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늘 스스로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사는 길인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의미가 있느냐고 죽지 말아야 된다고 늘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마다 사단의 전략 가운데 우리는 늘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뭔가 이유를 찾아야 되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다른 하나님의 모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 아담의 죽음과 둘째 아담의 죽음이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먹었습니다.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창의성과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런 존재인 첫 번째 아담이 하와가 그것을 먹고 나서 그것을 몰랐을까요? 하와가 남편에게 권유합니다. 어쩌면 아담은 하와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갔는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첫 번째 아담을 통해서 죽음이 주인 됐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첫 번째 아담도 그 죽음의 자리에 스스로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아담도 똑같이 죽음의 길을 갑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가롯유다가 쓴 유다복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밤에 몰래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불러서 예수님을 팔아야 된다고 그래야 예수님이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영지주의자들이 쓴 유다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계획하고 짜고 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칼을 쓴 베드로에게 칼을 쓰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열두 영의 천사들을 군사들을 물리칠 수 없는 줄 아느냐고 하십니다. 열두 영은 6천 명을 말합니다. 주님은 천사를 동원해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면할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죽음의 길로 들어갑니다. 둘째 아담입니다.

첫 번째 아담도 두 번째 아담도 똑같이 그 죽음의 길로 들어갔지만 둘째아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아담과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은 죽음이 주인 됐지만 두 번째 아담은 생명이 주인 되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략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어줌을 통해서 다 준 것처럼 보였지만 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진정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모략이 있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제 내가 자유인이 됐습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소위 구원파들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기쁨,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지옥에 가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12월에 전쟁이 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여전도사는 그것에 대해서 예언을 하다시피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지옥에 가봤는데 지옥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비윤리적인 문제로 와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다들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갈 수밖에 없는 놀라운 태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재벌3세 보다 더한 사람들입니다. 재벌 1세는 엄청나게 노력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것이고 2세는 그 아버지가 싫어서 매일 깽판치고 살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서 가업을 이어받은 사람이고 3세는 처음부터 성격도 좋고 돈도 쓸 줄 알고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이후의 사람들, 믿음의 3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유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종처럼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26절에 보면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주먹질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갈지자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있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고 분명하게 적을 치거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생명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인인데 어떤 권리든 다 사용할 수 있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략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사람들이고 또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엄청난 권리가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데는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는데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라고 말하고 새번역은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킨다.’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나는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킨다. 라고 말씀합니다. 단련시키든 굴복시키든 복종시키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이 몸을 스스로 억제하고 쓰지 않고 단련하고 복종하고 굴복시키는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쳐서 내가 맡은 생명을 품고서 사람을 얻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입니다. 복종하고 쳐서 굴복시킨다는 것은 몸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몸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몸을 친다고 하는 것은 내 몸을 굴리는 것입니다. 억제한다는 것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놀라운 신비라고 한다면 사람이 건강하려면 잘 먹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초창기 선교사들이 운동장에서 테니스 치는 것을 보면서 양반들이 ’왜 저렇게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고 있지? 아랫것들 시키지 않고‘ 라고 말하면서 돈이 나오느냐고 밥이 나오느냐고 했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신기합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내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몸을 움직여야 나오는 것이 땀입니다. 땀을 흘려야지만 내 몸이 튼튼해지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뻣뻣한 내 몸을 찢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제 딸이 어렸을 때 한동안 발레를 하다가 그만 둔 이유가 다리가 안 찢어져서입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 몸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몸으로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찢을 때 죽을 맛입니다. 제 아내가 가끔 스트레칭을 하면 쉬워 보여서 제가 따라해 보는데 잘 안됩니다. 연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님들과 같이 목회계획을 세우러 단양에 갔습니다. 한 목사님이 탁구에 정신이 팔리셔서 단양에 가면 탁구를 잘 치시는 목사님이 계시다고 해서 단양으로 가게된 것입니다. 가자마자 탁구를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쳤습니다. 그 목사님이 드라이브하는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공이 오면 힘을 주지 말고 공을 맞추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양에 있는 탁구체육관에도 가봤는데 정말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보다 더 잘 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공을 매달아 놓고 매일 치는 연습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로도 한 시간씩 반복해서 연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목회나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들처럼 탁구를 잘 치려면 매일 한 시간 씩 매달아놓고 공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습하는 분들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농구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농구할 때 공을 잡아서 던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0.3초라고 합니다. 0.3초만 남아있으면 3점 슛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주로 마이클 조던이 그런 슛을 잘 넣었습니다. 조던은 매일 불을 크고 골대를 보면서 만번 씩 공을 던졌다고 합니다. 공을 잡아서 보고 던져서도 안 되고 잡자마자 몸의 감각으로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머리로도 알고 있고 마음으로도 아는데 몸이 안 따라줍니다. 탁구를 하던 농구를 하던 발레를 하던 체조를 하던 내 몸으로 연습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습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마다 먹고 먹고 또 먹어서 고지혈에 걸립니다. 연습을 해서 내 몸을 단련시켜야 하는데 여전히 몸을 단련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몸만들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만들지 않고 계속 마음과 생각으로만 삽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내 몸을 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시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내 몸을 억제해서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종기입니다. 종기는 넓적다리와 무릎 등 하체에 많이 생기므로 하반신의 신경이 상하여 무감각해지고 점차 관절로 감염되어 뼈마디 마디를 무력하게 함으로써 결국 땅을 딛고 서 있지 못하게 만드는 병을 말합니다. 종기가 그렇게 만만한 병이 아닙니다. 말씀에 보니까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 몸에 종기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 가운데 앉아있습니다. 결국 땅에 서 있지 못하는 병에 걸려서 재 가운데 앉아있습니다.

재 가운데 앉아있는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재가 고름이나 진물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 가운데 앉아있으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어서 어떻게 보면 쓰레기더미에 앉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 몸에는 종기가 나고 인생의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배구하다가 손가락인대를 다쳐서 깁스를 했었는데 손 전체를 다 감싸는 깁스를 하니까 정말 답답하고 손에 스물스물 뭐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바로 병원에 가서 풀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시면서 한 쪽을 열어주셨는데 정말 살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몸에 엄청나 상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한 몸이라고 하는 돕는 베필인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아내와 사이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아내의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욥이 반응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과 저주가 다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죄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리석고 하나님 앞에 있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욥의 신앙은 몸의 신앙입니다. 나중에 욥은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몸의 엄청난 아픔이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몸을 쳐서 복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몸의 연약함이 있을 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내가 어떤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통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이 자학하는 종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외국에 가면 고난주간에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자학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자학의 종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얘기한 것처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자리로 들어가는 것처럼 욥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해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자기 몸을 찢으면서 그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몸을 쳐서 단련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은 몸의 신앙입니다. 생각이 아니고 마음이 아닙니다. 몸으로 살아야 됩니다. 깨지고 부서지고 일그러지기 쉬운 것이 몸입니다. 그런데 이 몸이 깨지고 부서지고 일그러지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것을 묵상할 수 있고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의 그 상처가 예수의 흔적이 오늘 내 몸에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체휼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 가서 예배드릴 때 항상 드리는 말씀이 중에 하나가 ‘아프시죠? 이 아픔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욥의 모든 아픔들이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누구든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얘기하면 떡이 5천 명을 먹이기 위해서는 5천 번을 찢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찢어지지 않으면 먹일 수가 없고 찢어지지 않으면 누군가를 살릴 수 없습니다.

사단이 준 종기입니다. 악담이고 저주이고 슬픔이고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사단이 준 종기를 통해서 몸을 치는 몸을 단련시키는 또 다른 훈련을 통해 복종케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몸이 내 연약한 몸이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되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기 안에는 예수의 보물이 있습니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 안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파도 그냥 아파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지고 가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의 몸으로 훈련하고 훈련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가정이 제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한 생명을 품고 갈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 살 전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놔야 합니다. 세 살까지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아기예수님으로 오신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인데 연약한 자 중에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처를 다르게 쓰라고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보물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딸이 공간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다리가 퇴화될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하루에 만보씩 걸어야 된다고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하려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져서 종기 앞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가 우리 가운데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몸을 치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내 몸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은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깨지고 부서지고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한 몸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질그릇 가운데 보물이 있다고.
질그릇은 질그릇 자체로 존귀한 것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를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준 시험일 수도 있고
내 인생의 채찍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막대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저주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절망과 슬픔이라고 얘기합니다.

욥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모략과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있는 상처와 아픔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겠노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슬퍼하고 절망하는 그 자리
하나님 앞에서 다시 부활의 자리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태생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다면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살겠노라고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겠다고
내 몸을 단련시키겠노라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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