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친 구 (욥기 2:11-13, 요한복음 15:12-17절)

우리가 욥기를 공부하면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고난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단순하게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계셨고 그 고난은 모든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 주님과 함께 고난 가운데 동참하는 자들이 되는데 고난 가운데 동참하는 자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 또는 인생의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의 본질을 바라보게 되는 인생의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면 유대교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잘됨교에 빠져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삶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는 가장 비천한 그리고 가장 큰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고 기독교가 믿는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구약에서의 예수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을 통과하지 않으면 엄밀히 따지면 고난 받는 구원자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한국교회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여호와하나님이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가장 처절하고 가장 비참한 그런 삶을 살아갔던 그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을 통과하지 않으면 가장 평범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그 고난의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영광의 메시야 또는 우리가 만든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는 이 삶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고 십자가에서 죽는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요소가 무엇이냐 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가장 큰 방해도 가장 큰 힘도 친구입니다.

친구는 욥기에서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네가 진짜 예수를 믿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계속 걸림돌로 장애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친구입니다. 친구가 와서 한 마디 합니다. 그 한 마디가 내 마음을 격동시켜서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문제아들의 부모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친구를 잘 못 만나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친구를 잘 못 만나서 자기 자녀가 그렇게 변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핑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친구라는 것입니다. 욥기의 모든 이야기가 친구의 한 마디, 친구의 충고 또는 친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15장 12절부터 17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것을 말한다고 하는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주님을 친구로 대우하고 주님도 우리를 친구로 대우해주셔서 가장 동등한 관계 속에서 우리를 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친구입니다. 어떤 때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성장과 성숙의 통로가 되는 것이 친구라는 것입니다.

친구라고 하는 개념을 찾아보니까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입니다. ‘지기’라는 말에도 친구의 의미가 있는데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지기 또는 지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어로 Friend가 Free, Remember, Idea, Enjoy, Need, Depend입니다. 가장 자유스러운 관계이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고 같은 생각과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이고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친구이고 의존하고 의지했던 사람이 친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포도나무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가지인데 가지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원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장 어디에서도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거하라고 얘기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하면 붙어있으면 붙어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붙어있는 개념을 두 가지로 얘기하십니다. 하나는 제자입니다. 제자라면 붙어있는 것이고 제자라면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보다 더한 개념이 친구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위, 아래 상, 하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개념도 사실은 생명관계이지만 아버지는 뭔가 더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아들은 물려받을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친구라는 가장 동등한 관계로 이야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 보다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한 거하라는 의미는 친구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을 때 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의 관계인데 종은 은혜를 추구하는 관계입니다. 주인이 베푼 것을 받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종과 자녀는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일의 관계이지만 자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의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의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보다는 후사가 낫습니다. 자녀는 매일 요구만 합니다. 그런데 후사는 이제 부모의 뜻과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은 종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고 후사도 아닌 친구의 개념으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개념은 더불어, 함께, 서로입니다. 이제는 1:1의 관계입니다. 친구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너와 내가 아주 동등한 관계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관계입니다. 물론 일을 할 때 마다 계산하고 있으면 동업자이지만 계산하지 않고 함께 일을 해나간다면 동역자입니다. 구글이든 마이크로소프트사든 애플이든 다 친구끼리 함께 세운 회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친구끼리 절대 동업하지 말라고 합니다. 친구끼리 동역을 해야 되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하고 당연히 더 동역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친구관계 깨진다고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친구끼리 동역을 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관계로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친구의 관계까지 가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무너지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서 17절 말씀은 친구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세 가지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5:16)’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든지 아니면 상대와 친구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보통의 개념이라면 주님과 친구의 관계는 선택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친구를 만나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좋은 친구로부터 선택 받아야지만 친구의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친구로 선택했다.’ 고 말씀하십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친구, 동역자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내용입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던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나서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네 원수 오네시모를 내가 낳았고 그를 내가 동역자로 삼았고 그래서 그 원수 오네시모를 친구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한다.’ 라고 말합니다. 손해를 끼쳤고 종이었습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함께 동역하는 친구로 삼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주는 친구를 선택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도망간 조카 롯이 전쟁을 해서까지 되찾아오는 친구였습니다. 롯은 한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망한 집안에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친구가 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네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의 것만 먹겠다고 결정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고 결정하고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더 나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줄 사람들을 선택하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미국에 가서 제가 가장 놀랬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나라는 20대와 40대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나라라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알던 1.5세 육기드온 목사님이 중학생 사역을 하셨는데 미국 아이들은 목사님을 부를 때 ’기드온‘하고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아이들이 ’기드온‘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셨습니다. 맞먹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친구라면 나이가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빠른 86인지 늦은 86인지를 따집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알려야 맞먹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관계는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를 모르면 서로 관계하는데 굉장히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분명히 알게 되면 ’아 쟤는 나보다 아래.‘ 라고 마음을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는 상, 하가 분명한 관계이고 밑에 사람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니가 뭘 안다고 한 번 살아 봐.‘ 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한 번은 40대 목사님이 60대 전도사님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문화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으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땅콩인지 아몬드인지 구분을 못하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노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친구는 비밀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비밀을 알게 하는 것이 친구입니다. 여자들은 서로 비밀 이야기를 나눈다면 친구이고 비밀을 말하지 못하면 친구가 아니라고 한답니다. 비밀을 알게 하는 것이 친구의 관계입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서로의 비밀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공격받을까봐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의 비밀을 절대로 적이 되지 않을 사람 앞에서 말한다고 합니다. 주로 여자들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잘 모르는 여자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친구들은 속이고 물어뜯고 서로의 것을 챙기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밀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약점과 단점과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들조차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비밀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왜 하나님의 비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연약한 것을 덮어주고 연약함을 잊어주고 그 연약한 것을 씻겨주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친구 되시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덮어주시고 많은 것을 잊어주시고 많은 것을 씻어주셔야지만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중학교 동창끼리 모였는데 68등 하던 아이가 회장하고 65등 했던 아이가 총무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서로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멋모르던 때에 있었던 일들은 서로 덮어주고 서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친구라면 그 사람의 어두운 면까지 품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다 갚아주고 빌레몬에게 덮어주고 잊어버리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원수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덮어주고 잊어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친구입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것이 동역자입니다.

세 번째는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서로’입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은 종이든지 자녀의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친구는 ‘서로’입니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동등하고 친구는 대등하고 친구는 서로 존중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령하지 않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관계가 친구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이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친구의 관계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한 번 살아 봐.’ 가 아니라 그리고 늘 명령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셔서 나와 의논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욥기 2장 11절부터 13절 말씀에 보면 친구들이 욥을 찾아옵니다. 다 외국 친구들입니다. 데마사람 엘리바스, 수아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온 친구들입니다. 좋은 친구들입니다. 좋을 때는 친구를 만드는 것이고 나쁠 때는 진짜 친구인지를 분별한다고 합니다.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는 힘들 때 어려울 때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친구는 어쩌면 좋은 친구이고 나쁜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욥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 정도만 해도 세상에서는 좋은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미 있는 친구들입니다. 울며 찢고 뒤집어쓰면서 고통당하는 모습에 입을 열 수조차 없다고 하면서 앉아있는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친구들이 나중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의 모습이 가장 인간적인, 가장 사람다운 모습인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고통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본성조차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기만 해도 좋은 친구라고 얘기하는데 우리는 더 놓은 차원의 친구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년 30년 만난 친구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세 친구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하는지 알 수 있지만 인간미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있어서 사람이라면 또는 인간이라면 또는 내가 아는 친구라면 하는 것을 통해서 계속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이 선택하셨고 주님이 그 비밀을 알게 하셨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선택과 예수그리스도의 앎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지 않으면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선택은 오랜 만남을 가졌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선택은 가장 연약한 자, 가장 고통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친구입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친구를 사귈 때 나 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돈 많이 버는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제 조카 하나가 몇 조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집의 며느리인데 그런 가족과 가까이 하면 뭔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한테 손가락질 할 수 없고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친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가장 없는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심정이 있습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려서 온 집 안을 뒤져서 찾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두 아들 중에 집 나간 아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선택이 없으면 계속해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의 앎, 신비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비밀을 얘기할 때 둘 만의 소중한 추억을 말하는데 그런 소중한 추억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얘기합니다. 서로 꿈을 얘기하고 서로의 소망을 말하니까 함께 꿈을 꿉니다. 시간이 아닙니다. 20년 30년 시간의 개념으로서의 친구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동지입니다. 뜻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간적으로 가장 친한 친구가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냥 인간적인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는 동지로서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앎의 기준이 없으면 인간적으로 슬퍼하고 울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위로하는 것 같지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이 사랑의 개념은 정말 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랑은 손해보고 살아가는 헌신의 사랑입니다. 데마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에게는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친구들이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은 아니었습니다. 이 본문만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욥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전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친구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사람이 저래서 어떻게 살겠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초월하고 살아야 합니다. 피투성이라고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고 친구를 만들어가는 신앙의 삶입니다.

첫 번째 친구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앎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으신가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공감하고 같이 울어줄 친구 말고 정말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으신가요? 내가 망했다고 해서 와서 울어주는 친구 말고 망했을 때 와서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친구가 있으신가요? 친구 만드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연약한 자들을 찾아서 친구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선택해서 친구 삼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친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역할 수 있는 친구입니까? 친구 만들었다면 기준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세계를 함께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비밀, 너와 나 사이에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 세상 누구도 말해줄 수 없는 20년 30년 아니 50년 된 친구가 있다할지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 친구는 영원한 친구입니까?
기분 나쁘다고 끊어버리는 친구가 아니고 나한테 잘 해주기 때문에 존경하고 존중해주는 친구가 아니고 그 힘든 것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영원한 친구입니다. 솔직히 저는 저희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친구로 받아들이고 살기를 원하는데 전화도 안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버티고 그래도 상처 받지 않고 끝까지 영원한 친구로 삼아주려고 그렇게 살려고 하나님 앞에 결단합니다. 영원한 친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좋은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울며 찢고 뒤집어쓰고 고통당하는 모습에
입을 열 수 없는 욥의 세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조차도 뛰어넘지 않으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 죽음의 자리까지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 영원한 친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친구 삼으셨습니다.
내가 친구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은 친구를 위해서 죽는 그 죽음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 나도 주님의 친구가 되겠노라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연약한 자, 가장 부족한 자들을 찾아서
나도 주님처럼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고
이제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친구가 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렇게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자녀도 품 안에 자녀입니다.
자녀도 내 친구이고
내 남편과 내 아내도 친구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로에게 친구가 됩니다.

이 시간 영원한 친구로 남겠다고
영원한 친구의 관계를 시작하겠다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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