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로마서 14:1-12, 시편 1:1-6)

로마서 12장 이후 말씀을 보면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구원의 실제는 굉장히 다양하고 굉장히 모호할 수 있는 그런 교훈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내 삶의 모습을 볼 때 마다 그렇게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원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그 믿음의 원리를 어떻게 살아내는 것인가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마지막 심판, 처음과 나중이 있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 그 절대자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신 앞에서 우리들이 스스로 한 일을 내가 믿음의 원리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반드시 직고하는 시간을, 사실대로 말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믿든지 안 믿든지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그런 인생이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의 삶을 직고할 수밖에 없는 시간, 그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인생 속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십자가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망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한과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도 좌, 우가 분별되지 못하는 인생을 우리는 사망의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에는 죽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가 살았던 삶의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을 우리는 사망의 십자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된다는 것은 습관적이든 체질적이든 그것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다시 다짐하면서 후회와 다짐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오지 않는 과거의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영성에 사로잡힌 회개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할걸, ~~했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반복해서 똑같은 후회의 이야기를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망의 십자가와 실패의 십자가의 중앙에 서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죽음 속에서 스스로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는 영광의 십자가를 고백합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모든 인생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이루는 십자가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 관계를 통해서 생명을 낳는 또 다른 생명의 역사를 창조를 하는 것이고, 나와 너와 우리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낙원에 세우는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십자가 사망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 원리의 로고스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레마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 내가 쫓아가야 될 생명, 더불어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사람, 그 생명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개인의 선을 세우고 공동체의 덕을 세워나가면서 하나님의 생명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고 스스로 내어주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부활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이루라고 하실 때에 그 구원의 내용 그것은 말씀이고 그것은 사람이고 그것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의 역사 가운데로 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보물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는 이 고백 앞에서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숙제이면서 복이고 선물이고 또 이것이 사명이면서 동시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때에 직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왜 오른 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왼 쪽으로 갔어?’ 라고 얘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시콜콜하게 내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해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이 주신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님이 주신 일에 대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살았는가?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시면서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갯세마네 동산에서 죽기보다 싫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사람들에게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 뜻을 접겠다고 고백합니다. 누구는 배신하고 누구는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쫓아오는 제자들 앞에서 끝까지 12을 책임지고 끌고 가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끝내는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다 이루었도다.’ 저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 모든 지체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 밤에 죽음 이라고 하는 잠 가운데 들어갈 때에 ‘다 이루었도다.’ 하고 주무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다 이루었도다.’ 하고 돌아가셔서 아침에 부활한 후에 다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만나야 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헌신하고 내가 희생하고 내가 정말 내어줄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스스로 살았던 내 인생 속에서 누군가가 끌고 가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욱’해서 성질을 부리고 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실패의 십자가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또 어떤 때는 내 욕망과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내 모습 속에서 사망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십자가가 주님만이 걸어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다 이루었도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14장 1절부터 12절에서는 우리 안에 연약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내가 생각하지도 않은 무엇인가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들이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면 뼈와 뼈끼리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체, 내 몸의 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절부터 12절에서 ‘왜냐하면’ 으로 시작해서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습니다.(3절)’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고 존재가치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 받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존재가치로 인정받는 것처럼 형제들에게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대우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제 딸하고 아들하고 여덟 살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원수처럼 싸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싸우다가 이기게 되는 한 마디 말이 있습니다. ‘엄마가 그랬어.’ ‘아빠가 그랬어.’ 라는 말입니다. ‘먹지 마.’ 라고 하면 ‘엄마가 먹으라고 했어.’ 라고 하면 끝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고 내가 도대체 인정이 안 되고 그 사람하고 도대체 함께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인정이 안 되고 내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존재가치로 존중받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볼 때는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습니다. 연약한 자도 있고 강한 자도 있습니다. 다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인데 한 날만 주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4절)’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그 사람을 바르게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우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세우실 능력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인생의, 그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주인과 하인을 연결시켜 주는, 신랑과 신부를 연결시켜주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그런 중보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자입니다.

어린 아이가 걷기 시작하는데 걷는 모습을 어른 네 명이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적으로 아이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24시간 누군가를 눈뜨고 지켜본다고 할지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우실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절)’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얘기이고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비판하는 그 사람도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도 사나 죽으나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다. 뭔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고백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문을 100번을 외우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어떤 분이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면 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고 그렇게 간증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재단하고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와서 누군가 3일 금식을 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고백이 진정성이 있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그 고백이 있다면 내가 볼 때 조금 이상하다고 할지라도 서로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가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하는 그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연약한 자에게 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누군가를 업신여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왜 내가 인정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왜 여전히 불평하고 원망하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말씀도 주고 사람도 주고 일도 주었는데 너는 왜 비판하고 업신여기면서 결국에는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스스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다리만 튼튼해지는 나그네 밖에 못 되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다리가 튼튼해지고 용사와 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광야에서 살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왜 돌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답할 때에 정말로 하나님 앞에 ‘네 그렇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주님 내가 다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님이 주신 일에 대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직고’ 하는 신앙,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직고’도 착각에 빠져서 하면 안 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는데 주인이 종에게 그것을 준 것입니다.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돈입니다. 어떤 사람은 600억을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6000억을 얘기합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돈입니다.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받을 수 없는 돈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똑같이 주인 앞에서 account 합니다. ‘직고’ 라는 말이 사실대로 말하다, 판명하다 라는 말인데 영어로 account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실대로 계산하는 날이 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보소서.’ 라는 말입니다. 주인 앞에서 ‘이렇게 착한 일을 하고 이렇게 많은 일을 했습니다. 보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서서’라는 말은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했는지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칭찬 받았는데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에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착각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5:24절)’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주인이라는 것을 종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 앞에서 그도 당당합니다.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이자놀이라도 하지 그랬느냐고 얘기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행동은 무지, 오지, 망지라고 하는 이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일 모두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주인에 대해 잘 모릅니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주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다보니까 다 자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착각하고 왜곡하고 들어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시편 6편 말씀에 있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편 1:4절)’ 

마지막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바람이 하나님의 심판이고 직고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시편 1:5절)’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가운데 들어갈 때 마다 너무나 부끄럽고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모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해서 떠납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차원은 이미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더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순간에 스스로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았던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2절)’ 


첫 번째 직고하는 신앙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신앙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물이 있는 시냇가에 늘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의 가치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뜻을 즐거워하며 가야될 존재가 나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순간에는 꿀맛이었습니다. 만나의 맛도 처음에는 꿀맛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다 보니까 나중에는 박한 음식이라고 얘기합니다. 40년 동안 만나의 조리법이 바뀐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이가 드셔서 손맛이 없어지신 것이 아니고 맛은 똑같은데 먹는 사람들의 입맛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한 음식을 먹을 때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합니다. 너무나 좋았던 율법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율법 때문에 아파하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때는 가시 같고 어떤 때는 때리는 방망이와 같고 어떤 때는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칼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율법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풍성한 물을 먹으며 살듯이 마지막 때에 ‘다 이루었도다.’ 하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있는 것에 대해 즐거워해야 합니다. 

새벽예배가 저에게는 너무 고난이었습니다. 5분 기도하면 50년 기도한 것 같고 10분 기도하면 100년 동안 기도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 앞에 머무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시간이 짧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세 시간쯤은 기도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21일 저녁기도회를 하자고 선포할지 모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을 묵상하는 신앙입니다. 
마지막에 account, 하나님 앞에 설명해야 될 것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성경 Q.T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미나도 하고 설명도 다 했습니다. 다 이루는 것은 말씀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욕망과 욕심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사람들이 묵상의 자리에 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 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에게 붙은 이 기도의 불이 모두에게 붙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겠다는 결심이고 정함이고 확정입니다. 

세 번째는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인정이라는 말은 know 안다는 뜻인데 ‘야다’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직고한다면 단일을 이루고 살았던 삶이라면 내가 직고할 때 마다 하나님이 ‘아멘’ 하실 것입니다. 내가 고백하고 간증할 때 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에게 자랑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주님과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형제들 비판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늘 하나님을 중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단일을 이루는 이 신앙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나에게 맡겨진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십자가를 갈 것인지 
실패의 십자가로 갈 것인지 
영광의 십자가로 갈 것인지 
이 시간 주님 안에서 
그렇게 확정하고 정한 마음으로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어떤 모욕과 수치가 있다 할지라도 
어떤 희생과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에게 주신 생명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고 이기며 나아가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안에서 
결단의 기도, 확정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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