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장

창세기 7장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씀합니다. 요즘 문창극씨가 얘기했던 식민사관은 역사를 보는 관점을 얘기하는 것인데 문창극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웬만한 사람은 다 그 사람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유명한 큰 교회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고 장로님이니까 기존에 있는 사람들은 다 신앙의 얘기지 정치얘기냐?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관이지 식민지사관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두 가지 말의 의미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가지고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출애굽기부터 쓴 것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자기 공동체 안에서 또는 자기 민족 안에서 또는 자기 인생 속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건, 애굽을 탈출하면서 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입니다. 

누구든 신앙은 체험을 통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명한 중세의 초대 교부가 신앙은 이해를 통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을 통해서 이해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믿고 나서 이해하는 것인데 이해를 하고서 믿으려고 하니까 죽었다 깨도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조건 믿으란다고 믿어지는 최면 같은 것이 아니고 체험,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고는 죽었다 깨도 이 세계를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설교를 잘 하고 성경공부를 기막히게 잘 한다고 할지라도 체험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감동은 줄 수 있어도 인생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감동은 주는데 그것을 통해서 인생의 역사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체험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배와 말씀과 교제와 섬김과 교육이라고 하는 이 다섯 가지의 통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어서 지성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어도 믿음은 신비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의 차원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과정에서 다르게 이해가 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입니다. 만약에 신비의 세계가 없다고 하면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만 있어도 안 되고 철학만 있어도 안 되고 둘 다 있어야 신앙이 됩니다. 말장난 같기도 한데 종교는 어떤 행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행위를 동반하고 있지만 그 행위 자체가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는 육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했을 때 역사는 육적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을 역사 속에서 풀어내지 않으면 영의세계는 신비주의가 되고 또는 이성주의나 현실주의가 됩니다. 우리가 신비주의로 가도 안 되고 이성주의나 현실주의로 가도 안 됩니다. 신비와 이성이 어떻게 결합이 되어서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창세기는 세상의 시작인데 세상의 시작이 땅이라는 것 속에 영적인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땅으로 오신다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땅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라고 했을 때는 창조와 타락과 심판이라고 하는 기독교적인 역사관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 후에는 재창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타락과 심판 속에서 다시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는데 이 과정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세계관입니다. 윤회도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시작은 없고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작이 있으면서 끝이 있다고 하는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7장은 심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다시 말해서 영과 육이 하나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타락하게 내버려두시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7장이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장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어떻게 창조하셨고 사람이 어떻게 타락했고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처음에는 노아를 통해서 그리고 노아의 심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이 올 것이라고 예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는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전체의 엑기스가 여기에 다 있고 신약의 모든 엑기스가 창세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안에 복음이 있는데 다 근원적이고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복음이 들어있습니다. 구약도 복음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들어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를 잘 공부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노아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심판 하십니다. 노아는 증인입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썼다고 하는데 모세가 창세기 1장을 쓸 수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모세오경을 보면 예수님조차도 모세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모세도 어떤 신비적인 경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안에서 들려오는 얘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구전이라고 합니다. 말로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을 모세가 모아서 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모세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심판의 자리에 노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증인입니다. 증인이라는 이 관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하면 하나님이 오셨고 하나님이 영과 육을 지으실 때 영의 존재로 지으신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천사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육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이 중간 단계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여기에 타락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루시퍼라고 하는 마귀라고 할 수도 있고 사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은 선이라고 하는 천사도 두신 것이고 사람이라고 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존재도 만드셨고 그리고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는 악의 존재도 두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선을 만드셨는데 악이라고 하는 존재가 반대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얘는 악이 악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선과 싸우고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 잘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야, 네가 잘 못했어.’ 라고 얘기하신다면 가장 빠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의 존재가 악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제3의 증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는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한 이 존재가 악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마음대로 하고서 무슨 근거로 악하다고 하시나?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심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 근거는 사람이라고 하는 증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의 삶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증인이 필요하지만 신의 세상에서는 증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감히’ 증인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라고 말하는 이 신이 인격의 신입니다. 우리가 늘 인격의 신을 잊어버리면 자꾸 신 자체를 어떤 원리로 이해하거나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이성적인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속에서 천사하고도 관계하십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천사와 대화하고 사람하고도 얘기하십니다. 구약에서도 천사가 나타날 때 천사들이 세 명이 나타날 때도 있고 군대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급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이 기도했는데 길이 막혀서 천사가 21일 동안 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천사와도 관계하고 있고 사람하고도 관계하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영이 천사입니다. 유대인들은 각각의 사람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논리는 자기가 원하는 그 천사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튼 증인의 삶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보는 심판의 자리 속에서 노아처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부릅뜨고 다 봐야 되는 것입니다. 다 경험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애들이 말장난하는 개그프로가 있었습니다. 손님 초대해서 장난치고 얘기하는 프로였는데 신문 페이퍼에 ‘이 증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증거했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증인이 아닌 것입니다. 증인은 봐야 되는 것이고 듣고 있어야지 증인이 되는 것인데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사람이 무슨 증인이냐고 하면서 미국 애들은 그 얘기 때문에 웃습니다. 

노아는 심판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했는데 하나님이 판사이고 사탄이 검사고 예수님이 변호사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피해자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 부릅뜨고 진리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보고 살아야 합니다. 보지 않고 외면하고 살면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할 얘기가 없습니다. 언제 비가 왔고 얼마 동안 비가 왔는지를 본 노아가  증인입니다. 심판은 증인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14. 6. 29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