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라 2 (학개서 1장~2장)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 목적입니다. 부르심 받은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압니다. 한계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오류는 자신이 잘못한 것입니다. 부르심이 있어야 내 삶의 한계와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 없으면, 내 삶의 목적이 없으면 내 삶을 내 스스로 분별할 수도 없고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맞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르심의 목적이고 부르심이 주는 혜택이고 부르심의 열매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마다 믿음의 실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순종으로 내가 희생하고 헌신할 때 마다 영원성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순종에 달려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순종을 통해서 영원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학개서의 주제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으로 임재하시는 성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인해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거룩함을 스스로 이루기 위해서 남의 눈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평가에 자기 스스로를 맞추려고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조종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사람을 어떻게 일을 어떻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을 사용합니다. 힘을 사용하는 것을 조종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자기의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만의 세계관, 자기만의 세상을 만듭니다. 주기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성향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로 살아갑니다. 벼랑 끝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 사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데 16년 동안 사람들을 멈추게 했던 모든 상황이 있었고 다시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켜내는 용기, 죄와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를 아는 것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를 움직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내가 왜 그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지,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묻고 듣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묻고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대체 왜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르신 사람, 부르신 일, 목적이 분명하게 있어야지만 그 속에 용기가 있고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묻고 듣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있어야 되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1:7)’ 

‘그 때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1:13)’ 

학개는 내가 말하는데, 내가 들었는데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얘기합니다. ‘나 여호와가, 만군의 여호와가’ 라고 아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위임받은 그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이들에게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실제적으로 자신 있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는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순복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방언을 하다가 갑자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방언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이 예배를 받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분이 그 방언을 통역했습니다. 첫날 제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여기는 이단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자마자 자신은 닥터조를 존경한다고 해서 도대체 닥터조가 누구지? 하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조용기목사님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닥터조는 최고의 목회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고 하는 그 부르심은 사실은 그 안에 신비의 내적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내적체험입니다. 2천 년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100%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심은 신비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고 설명이 안 됩니다. 

제가 과거에 날라리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교인 전체가 모여서 부흥회를 하는데 다 같이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저에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음성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음성이었다고 지금도 믿습니다. ’너는 내 일을 하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듣고 나서 도대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일이 뭘까 제 나름대로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아프리카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어머니뻘 되시는 형수님께 그 얘기를 했더니 ’삼촌 더 살아봐.‘ 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형수님도 믿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제 꿈이 목사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그 날 이후로 제 꿈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내적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학개가 그런 내적체험, 내적인 확신이 없었다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읽지만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의 학개의 내적 갈등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학개가 내가 여호와인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받은 말씀이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 여호와가 말한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그 당시 최고의 총독 자기 나라의 왕과 같은 존재에게 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사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행 21:10-11)’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듣습니다. 

‘우리가 그만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2)’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이 각오가 사도바울의 부르심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을 위해서 사도바울을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통해서 로마로 갈 것이라고 나중에 또 하나님이 예언하십니다. 성령께서 죽으러 가지 말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자기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그 속으로 갑니다. 저는 둘 다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언도 맞는 것이고 사도바울도 맞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는 사람들도 맞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가는 것도 사도바울의 믿음이었고 부르심이었습니다. 

부르신 하나님이 가끔 들이대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전문용어로 ‘들이대심’이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들이대십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시고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도 의문을 갖도록 test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지만 사실 우리가 우선순위가 정해집니다. 우선순위가 ‘내가 예배를 열심히 드려야지.’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치원, 초등학생의 수준입니다. 

2014년 한국 땅에서 살아내게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냥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모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3개월 전에 교회가 하도 시끄럽고 문제가 있어서 아내에게 수련회를 가지 말아야겠다고 얘기했었습니다. 몇 명 가겠느냐고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제 아내가 몇 명 안 되더라도 가야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저한테 들이대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장소도 급하게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개척이래 이번이 가장 많은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목적이 다른 것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분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하나님이 왜 이곳에 부르셨는지를 모르면 다 헛것입니다. 우선순위 없습니다. 제 눈치 보느라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거룩함이 그대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왔다면 왜 이곳에 와서 기도하게 하시고 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왜 우리가 하나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 가운데 한 몸으로 살게 하셨는지 라고 하는 부르심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왜 한국 사람으로 맨날 유언비어가 통하는 사회에서 너무나 화가 나는 이 사회에 더구나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과 북이 갈라진 이 민족 안에 맨날 하나가 안 되고 싸우고 있는 이 민족 앞에 왜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 부르심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벼랑 끝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선순위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하는데 뭘 물어야 할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지에 대한 것을 학개는,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로 당당하게 떳떳하게 갑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4)’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그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 가운데서 굳세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4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굳셈은 다른 것에 쓰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정하신 공간이 있습니다. 동쪽에 가서 마당을 쓸라고 하시든 서쪽에 가서 문지기를 하라고 하시든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웃찾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이사야11:2)’ 

하나님이 부르신 내적체험은 하나님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 일곱 가지 일을 하십니다. 일곱 가지의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부르심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 여호와는 ‘I am who I am.’ 현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의 영인데 날마다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 임하시면 내가 절망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불일 듯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지혜의 영, 총명의 영은 미래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꿈과 비전과 환상을 봅니다. 방자한 백성들, 오락가락하는 백성들은 비전이 없고 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지혜의 영과 총명의 영이 생기면 꿈이 생기고 환상을 볼 수 있고 비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하고 그냥 이야기를 하는데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경험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환상을 보고 비전을 봅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모략과 재능의 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현재에 주시는 능력입니다. 모략은 전략, 전술, 계획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고 벗어날 수 있고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재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강림하시면 그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이것은 과거적인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 다시 꿰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하니까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다시 이해되는 아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와 과거로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영을 통해서 살아야 될 목적을 방향을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개가 경험했던 세계였고 학개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부르심의 영이 강림하셔서 또 다른 부르심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부심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부르심은 공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의 부르심이 있고 공동체의 부르심이 있고 이 민족과 열방에 대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내 삶 전체 방향으로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큰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따라가는 비전과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꿈이 농촌목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촌목회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운동권선배들이 다 농촌목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가 농촌목회를 했다면 아마도 매일 읍내에 나가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우리나라 시골 같은 워싱턴D.C에 갔는데 일주일정도 밖에 안 됐는데도 온 몸이 비틀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뉴욕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도시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청년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저한테 목사님 교회에 와서 기획목사를 하라고 하셨는데 청년목회를 할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그 분이 지금의 감독회장님이십니다. 그런데 청년교회를 하려고 하다보니까 교회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교회에는 청년들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함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또는 있는 자와 없는 자가 헬라인과 유대인이 함께 어울려있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서울’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도시형인데 어느 도시를 선택할까 생각하다가 서울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 꿈이 서울에 스무 개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몇 년 전에 전주에 있는 3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어떤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는데 저에게 올 수 있느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한 얘기가 제 꿈이 서울을 품고 목회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제 부르심의 분명한 목적을 알고 있고 제가 가지고 있는 비전과 제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한계와 가이드라인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어떤 사람도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들이대실 것입니다. 그 들이대심에 대해서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이 또 내적인 확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부르심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부르심 받은 사람은 자기열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가 없어야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될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목회를 하는데 목회를 자기 열심으로 하다가 안 되니까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 저 못하겠습니다. 사표 내겠습니다.’ 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 목회지 네 목회냐?’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합니다. 하나님이 막대기를 통해서도 돌들을 들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결과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기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는지 계속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동기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다 결과중심으로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저는 결과를 내려놓아야지 하나님이 또 다른 승리의 결과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성공의 결과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리는 내가 안 떠들어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 진리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되어야지 남은 자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고 진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진리는 살아남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 한 사람이 되고자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이기는 것입니다. 

부르심 받는 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강림하셔야 합니다. 단비와 같은 성령이 불같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기름과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단비와 같은 성령이 내 메마른 마음에 오시면 상황을 보지 않게 하시고 내 존재를 통해서 가장 풍성하고 부유함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불교는 나로부터 내가 세워져야 되는데 기독교는 내가 안 되고 외부로부터 오는 또 다른 존재로 채워져야 됩니다. 사람들이 수많은 일을 했지만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안달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갈급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단비와 같은 성령이 부어지면 풍성해지고 부유함을 깨닫게 됩니다. 불같은 성령이 소멸하는 불을 우리에게 주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부터 떠나게 해주십니다. 죄를 태워주십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하나님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하는 성품이 나타납니다. 기름과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를 구별시켜주시고 분별시켜주십니다. 성령의 강림하심을 경험하는 내적체험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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